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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일지

성장의 분기점에서 마주하는 일상다반사

by 노랑재규어 2022. 3. 28.

우리 회사의 다음 성장 포인트는 인적 자산의 질적 향상인가?

 

우리 회사가 이만큼 오는 데까지 참 많은 운과 때맞는 의사 결정이 작용했다.

 

회사를 갓 설립하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되길 강력하게 요구하며 의사결정을 기다린다.

회사의 현재 상황과 여건, 지향점 등을 모두 고려해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고, 그런 결정과 실행이 잘못된 것이지 않는 운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기술의 확보나 인력의 확보, 회사의 규모 확장 같은 것보다 당장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전 직장의 퇴직금과 실업급여 일부, 그리고 어머니께서 빌려주신 얼마의 돈을 모아 2500만 원이라는 매우 작은 자본금으로 시작한 우리 회사는 모든 것이 쪼들렸다. 같이 창업한 동료들은 이미 전 직장에서 손해를 많이 보아 자본금을 댈 능력이 없었고 더구나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본금만으로는 월급도 언감생심 꿈꾸기 힘들었고 그로 인해 가정이 있는 두 사람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곧 이직했다.

 

정말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한 우리에게 당장 일감이 떡하니 떨어질 리 만무했고, 약 반년 정도의 시간 동안의 그야말로 대면 영업을 통해 겨우 일을 받기 시작하여 밥을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이라는 게 재하청이거나 재하청의 재하청이었으니 가격 조건이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본업인 개발 분야에서 원청의 사업을 수주하는 것이 다음 목표가 되었다.

 

원청의 사업을 수주하려니 우리에게 없는 것이 실적이었다.

실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 중 가장 간단하고 가장 객관적인 방법이 실적이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실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설사 발주기관의 실무자가 우리의 실력을 잘 안다고 해도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와 직접 일할 방법이 없었다.

실적은 어떻게 구해지는가? 사업을 수주해야 실적이 쌓인다. 사업은 어떻게 수주하는가? 실적이 있어야 사업을 딴다. 이 딜레마 앞에서 느껴진 벽과 좌절감에 많은 걸음이 내 신발 위에 흙먼지를 쌓았다.

 

재하청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유효기간이 있다. 

처음에는 신규인력 중심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싸다. 그리고 이들이 실력이 쌓일 때까지는 경력과 수입이 비례해서 증가한다. 하지만, 이들의 실력이 정체되는 시점부터는 인건비만 증가한다. 더불어 진입장벽이 낮은 분야일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에 사업단가는 해마다 떨어진다. 그 손익의 역분기 지점이 올 것임을 인지하고 준비하지 못한다면 오래지 않아 부도를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비굴함을 창피해하지 않고 굴욕적인 조건에서도 일을 하며 버텼다. 그리고 조용히 우리가 도전할 수 있는 조그만 사업들부터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적자의 폭도 깊어져 갔다. 내 월급을 포기한지는 이미 오래였고 직원들 급여나 사무실 환경도 넉넉하진 못했다. 하지만, 서서히 우리의 실적의 질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우리 분야의 주요 원청사가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사업수주의 방법이 재하청에서 컨소시엄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이 차이는 두 가지의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우선 계약 조건(금액과 지불조건)이 좋아진다. 그리고 컨소시엄의 사업은 실적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생각지 못한 좌절이 다가왔다. 우리에게 재하청을 내주던 주 고객이 우리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 주던 일을 급격하게 줄이기 시작했고, 원청사와 약속한 업무 분할 조건을 우리와의 이면 계약을 통해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업무 분할 조건은 원청사가 아는 것과 우리가 아는 것이 서로 달랐다. 우리보다 원청사가 더 분개했었다. 이러한 견제는 나날이 심해졌고, 급기야 회사의 생존이 위험해졌다.

 

새로운 주요 사업이 곧 발주될 판에 굴복하느냐 맞서느냐의 기로에 섰다. 고개를 숙이고 불리한 조건이라도 받아들이면 당장의 목조임은 풀릴 것이지만 서서히 말라죽을 것은 자명했고, 맞선다면 당장 죽거나 살아남거나 둘 중 하나이지만 살아남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하루하루 피가 말랐고,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은 다가왔다.

 

Boiling Frog Syndrome.

죽는지 모르고 익숙함에 안주하면 그냥 익어버린다.

 

오늘 죽나 일 년 뒤에 죽나 죽는 것이 마찬가지라면 냄비에서 뛰쳐나가서 죽기로 했다.

쿠데타나 다름없는 도전을 했고, 정말 모든 것을 다 걸었다. 일부 직원들은 이미 퇴사했고, 몇몇 중요 직원들만 남아있었다. 정말 계란으로 바위깨기였다. 최선을 다하고 죽는 것이 이런 거지 싶었다.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겼고, 우리는 기적 같은 승리를 따냈다. 우리가 그간 쌓아온 실력과 실적이 이때 빛을 발했다. 가까이에서 본 사람만 알지만 우리는 정말 모든 것을 걸었고, 절박했으며, 진인사대천명하고 운을 기다렸다. 모르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심을 한다. 아는 사람들은 정말 멋있었다고 다시 봤다고 한다.

 

그 멋진 승리는 내 인생과 우리 회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최소 일 년 간은 그 승리의 후유증으로 시달려야 했다. 사업을 수주했지만 계약이 차일반 미뤄졌다. 발주기관이 공공기관이니 계약이 틀어질 리는 없다. 허나 그해 5월에 수주한 사업이 12월이 돼서야 계약되었다. 사실 우리는 그 전 해 말부터 쿠데타를 일으켰다. 우리의 당시 주 고객은 그 전해부터 이미 일을 급격하게 줄이고 있었지만, 우리가 반기를 들 때쯤에는 사업 자체가 없었다. 사업 수주와 계약 간의 기간이 이렇게 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자잘한 사업이라도 수주할 형편이 못되었다. 고스란히 1년을 수입 없이 보내야 했다.

 

1년의 무수입. 우리에겐 치명타에 가까웠다.

1년간 수입이 없다는 것은 10~20년 치 이익을 모두 날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뜩이나 적자를 누적하고 살아왔는데, 1년을 수입 없이 버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흑자부도가 눈앞에 다가왔다. 문 앞에서 얼어 죽은 탐험가의 심정과 같았다. 우리는 쿠데타에 성공했지만, 굶어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고, 그간 쌓인 적자들을 다시 회복하기까지 엄청난 고난과 시간이 앞에 남았다.

 

몇 년간에 걸쳐 우리의 체력을 회복하는 노력을 했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승리였지만, 그 승리와 함께 온 후유증을 회복하는 것은 또 다른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외견 상 커다란 승리를 했으니 밖에서는 그만큼의 성장을 기대했고 안에서는 그만큼의 보상을 기대했다. 살아 남기 위해 쌓은 적자는 장부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부채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지혜롭게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방향으로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다. 승리의 고취감은 내 몫이 아니었다. 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우리를 추스려야 했다.

 

수년이 걸렸다. 못났다는 비난도 들었다. 회사를 키울 줄 모른다는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부끄럽습니다.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이런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느 날. 정말 어느 날.

적자 행진이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월급 걱정을 안 하는 한 해를 보내보기도 했다.

그리고 회사의 실질적인 이익이 쌓이고, 잠시 자금의 회전에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행복하다. 행복했다.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

 

오늘도 내 신발에는 흙먼지가 묻었다.

다시 그 경고가 머리를 때렸다.

Boiling Frog Syndrome.

우리의 겉 모습은 화려해졌지만, 내실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더 엄청난 두려움이다.

 

흑자로 전환되는 느낌을 받을 때부터 다음 성장을 위한 중요한 요소는 무얼까 고민하고 있다.

인적 자원. 사람인 것 같다(물론 한 가지 더 있긴 하다. 그건 다음에 기회 있으면 이야기할 것이다).

 

인적 자원의 질을 높여야 한다.

그게 간단한 일은 아닌다.

마치 사업을 따기 위해서는 실적이 필요하다는 딜레마와 비슷하다.

 

또다시 신발에 수많은 흙먼지를 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중요한 결심들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이게 일반적인 기업의 성장 과정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아는 성공한 기업의 스토리에는 이런 흐름이 없다.

사실 스토리 꺼리가 되지 못하는 너무 지루한 흐름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길을 선택해서 바보처럼 미련하게 아직까지(는) 살아남았다.

 

다시 운과 적절한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다.

현실은 늘 거칠고 냉혹하다.

좋은 선택을 찾고 싶고 더 나은 선택들이 이어지는 운이 따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것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