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돈이 없으면 사업을 하지 말아야지."
어떤 경쟁사의 사장이 나를 두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해.
회사가 참 어려웠다.
5월에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사업이 12월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계약이 되었다. 1년여를 일없이 지내면서 잔고는 이미 바닥이 난지 오래였고, 여태껏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급여를 밀려봤다. 사실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계약이 되지 않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사업은 우리 회사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변곡점 같은 사업이었다.
우리 회사가 주업체로 사업을 수주한 것으로는 이전의 어떤 사업보다 규모가 컸고, 사실상 처음으로 주업체로써 수주한 사업이었다. 그 이전에는 한낱 소규모의 재하청 회사일 뿐이었다.
8개월여 만에 계약이 되어 첫 선급금을 받을 때, 나는 금융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것인지 처음 깨달았다.
보증보험 때문이었다.
개념을 잠깐 설명하자.
우리가 집을 한 채 짓는 계약을 했다고 치자.
집을 지으면 제대로 지었나 확인하고 돈을 지불하는 것이 상식이다.
허나 이 집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지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긴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집을 다 지었는데 갑자기 돈이 없으니 배 째시오 이러면 집 지은 업자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상호 간의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 대개 기간을 쪼개서 착수금, 중도금, 잔금으로 나누어서 돈을 지급한다.
착수금은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돈을 주는 것이다. 이 돈으로 재료도 사고 인부도 모으고 공사장비도 사용하고 하는 식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일을 해서 약속한 기일 동안에 기초 공사가 완료되었다면 이를 상호 검증한 후에 그다음 공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중도금을 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다 완성이 되고 모든 것이 종료되었을 때 남은 금액을 준다.
일을 한 것(기초공사 등)에 대해서 돈을 지불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 돈을 주면 된다. 그러나 일을 하라고 돈을 지불하는 경우,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런 경우, 만약에 지불한 돈만큼 일을 하지 못했을 때 그걸 보상받을 수 있는 방법, 즉 담보가 필요하다. 부동산이나 채권 등을 담보를 가지고 있다가 약속한 일을 마치면 그 담보를 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담보를 필요로 할 만큼 큰 일에 대해서 그만한 가치의 담보를 제공할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다. 100원어치의 일을 하기 위해서 100원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리고 어떤 담보가 얼마의 가치를 가지는지에 대해 일일이 평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제도가 보증보험제도이다.
즉, 100원 어치의 일을 하기 위해 100원 어치의 담보를 제공해야 하는데 그러기에 어려움이 있는 (대부분의) 회사에게 보증보험회사가 일정한 수수료를 받고 이 회사에 대해서 내가 보증을 서줄게 하는 것이다. 만약 문제가 발생할 경우, 보증보험회사는 그 대가를 치르고, 계약을 맺은 회사로부터 그 돈을 받아낸다. 즉, 담보능력이 부족한 회사를 대신해 담보를 제공해주는 대신에 수수료를 받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고,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정 금액 이상의 사업에 대해서는 이 보증보험 회사가 담보를 요구하는 것이다. 담보가 없거나 회사 신용도가 낮으면, 보증을 서주지 않는다. 어디선가 겪어본 상황의 데자뷔 아닌가?
그렇다. 은행이 돈 빌려줄 때와 똑같다. 신용도 높고 굳이 돈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싼 이자로 많은 돈을 빌려준다. 허나 정작 진짜로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주 높은 이자와 담보를 요구하고 잘 빌려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 혹은 회사가 재산이 넉넉하고 자금이 여유 있어서 굳이 대출이 필요 없을 때는 돈을 빌려가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신용 관리 차원에서 대출을 권고한다. 그런 사람이 정작 일시적으로 자금 회전이 안돼서 진짜 자금이 필요해진 경우에는 갑자기 돈을 안 빌려줄 뿐 아니라 빌려가라고 애걸복걸해서 빌렸던 돈도 당장 갚으라고 강요한다.
보증보험회사도 보험이 필요한 회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담보와 연대보증을 요구한다.
우리는 첫 선급금(착수금)을 보증받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해냈다. 담보와 대출을 통해서...
문제는 다음 선급금부터였다.
우리가 하는 사업의 특성상 선급금 정산이 되지 않아 보증 담보가 풀리지 않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선급금을 받아서 그 돈으로 만든 중간물(예를 들면 기초공사를 마친 상황)이 잘 만들어졌다고 인증을 받으면, 그 선급금이 그 공사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이 된다. 그럼 그 선급금은 이제 보증이 필요 없어진다. 그 가치만큼의 일을 했고 그 결과물을 가져갔으니까. 그럼 그만큼 새로운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분야의 일은 중간물이란 것을 뚜렷하게 정의할 수 없다(정확하게 말하면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1차 선급금을 받아서 그만큼 값어치의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걸 서로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업 종료 시점에 최종 완성품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선급금에 대한 보증을 해소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총 사업비만큼의 담보를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럴 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첫 선급금도 겨우겨우 받았는데...
처음 겪는 일이라 백방에 문의를 하고, 도움도 요청해보았지만, 원칙이 워낙 확고해서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때 그 경쟁사 사장이 그 소문을 전해 듣고 혀를 차며 했다는 말이
"(그런) 돈이 없으면 사업을 하지 말아야지."였다.
그 말을 나중에 듣고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냉혹하고 무서운 말인가. 돈 없는 놈은 사업도 하면 안 되는구나.
그 사장은 돈 많은 집안의 자식이다.
부모가 가진 재산이 서울 강남의 빌딩만도 몇 채란다.
소위 부동산 업자로 돈 쓰긴 졸부 소리 들어 창피하니까 회사 사장으로 돈 쓰려고 사장한다는 그런 부류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사람이다.
그 사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 사장도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나름 이 분야에서는 넘버 2 회사를 만들었다. 다만 망망대해에 빠졌을 때, 그 사람은 구명조끼가 있었고 나는 없었을 뿐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많은 사업가를 만나지만, 대개 집안에 재산이 많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솔직히 출발선이 다르고 여건이 다르다는 걸 많이 느낀다.
가끔은 나도 무리하지 말고, 내 자식들이 사업한다고 할 때 힘이 돼줄 수 있는 수준으로 관리할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의 아버지는 소위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기업 임원까지 출세하셨지만 중년 후반부터 당신 하시고 싶으신 사업을 하시다가 얼마 없는 재산을 잃으셨다. 나는 부모덕에 삶을 가난하게 살아보진 않았지만, 사업은 참 가난하게 시작해서 이제 겨우 배고픔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꽃을 시샘하는 봄바람에도 나는 오한을 앓는 독감에 걸릴 만큼 힘겹다.
만일 당신이 사업을 하고자 한다면, 가난은 너무 무겁다.
물론 그런 무게의 고통도 감내하겠다면 사업은 할만하다.
다만 막상 실제 그런 상황과 마주할 때 참 막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