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에서 성공하는 전형적인 벤처 회사를 꿈꾸며 창업했지만, 주머니가 가난한 사장은 단 몇 달 만에 죽음이 목전이다. 살아남아야 한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비굴하게라도 살아남아야 천하를 도모할 꿈이라도 꾼다.
개똥 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 하지 않는가.
재하청회사가 된 것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다.
마침 하청업체 관리 담당자가 바뀌었는데, 기존의 업체들에게 불만이 많았던터였다.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그 회사로 출근하던 내게 그는 일할 기회를 주었다. 그 담당자와 일을 해봤던 경험이 있고, 그가 우리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우리가 기존 업체들이 하던 일은 기본으로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업무 개선을 획기적으로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공하고 싶은, 욕망있는 중간 관리자였다. 우리가 꽤나 쓸만한 도구가 될 것이란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일 년 가까이를 굶으며 지내다가 첫 일을 받고 계약서를 작성할 때의 안도감이란...
정말 열심히 일했다. 밤을 새도 힘들지 않다는 말은 너무 진부한 이야기이다.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행복감이 좋았다. 그리고 얼마 후 창업 초창기 회사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사람을 뽑기 어려운 것과 돈을 받기 어려운 것. 이것에 관한 이야기는 이 블로그에서 지겹도록 참 많이 했다.
그런데, 돈 받기 어려운 상황은 그중에서도 참 특수하긴 했다.
불법 하도급의 전형적인 문제인데, 하청받는 회사(C)는 사업비를 받고 재하청받은 회사(F)에게는 돈을 안주는 것이다. 일은 F가 대부분 다했는데, 돈은 C가 쥐고 주질 않는다. 돈이 없어서 재하청회사가 되었는데, 돈이 더 많이 없다. 사람들을 뽑아서 일을 시켰으니 월급을 줘야 하는데, 그 월급줄 돈을 받지 못하니 빚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Q. 일을 했는데 돈을 왜 안줘?
A. 그 시절 부자가 되는 법, 사업 잘하는 법에 관한 책에서는 받을 돈은 빨리 받고, 줄 돈은 최대한 늦게 줘라가 제목인 챕터가 있을 정도였다.
Q. 고발을 하지?
A.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어떻게든 한 줄로 답하자면, 세상이 그리 녹녹하지 않다. 최악의 경우에나 마지막 수단으로 가능한 일이다.
Q. 담당자에게 돈이라도 쥐어주지 그래?
A. 정말 많이 들은 이야기이다. 저~엉말. 심지어 다른 재하청업체(D, E) 사장도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자금 담당자에게 일 원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 말고 다른 이야기가 뒤에 있다.
내가 그 재하청을 준 회사(C)와 결별할 때, E사 사장이 내게 했던 이야기가 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냐고...
그러면서, 그는 고릴라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밀림의 고릴라야.
용맹하고, 사냥도 할 줄 알고, 능력도 있지.
그런데, 어느 날 바나나가 들어 있는 문 없는 철장을 본 거지.
야생은 어쨌든 늘 배고프잖아. 바나나는 당장 내 눈앞에 있고...
바나나를 먹으러 그 철장에 들어간 거야.
그럼 사냥꾼은 계속 바나나를 줘. 대신 피를 뽑아가지.
죽지 않을 정도로 피를 뽑고 죽지 않을 만큼만 바나나를 주는 거야.
이젠 철장을 뒤흔들며 반항할 기운도 없어.
그러다가 죽든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바늘을 뽑아버리고 나가잖아? 사냥꾼은 개의치 않아.
이미 더 많은 고릴라가 그 철장에 들어가고 싶어서 뒤에 줄을 서있거든.
이게 뭐 그 사장이 지어낸 이야기든 원래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나는 이해가 되었다.
실제로 그는 죽은 고릴라가 되었고, 나는 죽기 직전 바늘을 뽑은 고릴라가 되었으며, 그 철장에는 새로운 건장한 고릴라가 곧바로 채워졌으니까...
나는 세상사람들이 손익계산서를 이해하도록 국가에서 강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아마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매출 10억이라고 하면 10억이나 벌었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야. 당신, 일을 10억 어치나 땄으니 돈 많이 벌었네. 그렇게 생각하던 많은 상어들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뜯어갔다. 딱 소설 "노인과 바다" 이야기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회사가 돈만 제때 주고, 그 상어 떼가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그 회사의 훌륭한 협력회사로써 정말 많은 실적을 공유했을 것이다. 그 회사는 소탐대실한 것이다.)
첫 1년 반짝 조금의 이익이 난 것을 제외하고, 매년 적자를 쌓아갔다.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은, 손익계산서를 쓸 줄도 읽을 줄도 안다는 것이었다. 세무서에서 써주는 손익계산서만 받고 통장의 숫자만 읽는 사장은 내가 돈을 벌고 있는지 잃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장부상의 손익계산서는 현실과 다소의 차이가 있다. 나는 우리가 일을 하면 할수록 돈을 잃는다는 것을 빠르게 간파했다. 오늘 총 맞고 죽을 것인가 서서히 말라죽을 것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젠장. 살아남으려고 뛰어내렸더니 하필 진창늪이다.
그거 아나? 능력있는 대학원생은 졸업이 늦다는 거. 교수 입장에서는 능력있는 대학원생이 오래 있어야 많은 프로젝트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평균 정도만 하는 학생보다 능력있는 학생의 졸업을 늦추는 경향이 있다. 우리도 그런 회사였다. 그들 입장에서 우리는 남들에게 빼앗기면 곤란한 업체였다. 그들은 정말 죽지 않을 만큼의 매출을 주면서, 그나마도 돈은 제멋대로 줬고, 다른 회사의 일은 하지도 못하게 했다. 윗사람이 부정하니 아랫사람들의 부정을 탓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죄다 상어 떼처럼 뜯어먹으려 했다. 모욕감을 느낄 만큼 하대받은 적도 많았다. 술 사달래서 사줬더니, 자기 회사에 납품한 거 다른 회사에 주다가 자기한테 들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멱살을 잡힌 적도 있었다. 그 사람은 다음날 자기 상사에게 나를 단도리 잘 쳐놓았다고 자랑까지 했다. 무슨 창녀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그 늪에서 빠져나왔을까?
우리는 그들과 관계없는 분야에서 조용히 차근하게 실적을 쌓아갔다.
처음에는 학교와 같이 일을 했다. 대학교는 국가연구과제를 많이 하는 편이다. 대학교 교수들은 이론적인 결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논문이나 특허가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 연구소는 국가연구과제의 중요한 평가 요소인 "실질적인 결과"를 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리고 그런 실제 그런 결과를 낼 줄 아는 대학원생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졸업하는 순간 남이다. 그래서 똘똘한 대학원생이 하는 그런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 큰돈은 안되지만, 실적이 남고 자잘한 인건비 정도는 건질 수 있으며, 교수들과의 친분도 돈독히 쌓을 수 있었다. 그 보잘것없는 실적이 앞서 말한 실적의 딜레마를 해결해 줄 씨드였다. 돈이 얼마가 되었든 관계없이 자잘한 실적이란 것이 쌓이기 시작했고, 그걸 기반으로 그보다 조금 큰 실적을 또 쌓을 수 있었다. 더디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우리가 다른 재하청회사인 D, E와 다른 점이었다.
조그만 실적이 쌓이기 시작하자, 두 가지 방향에서 우선 길이 열렸다.
국가가 지원하는 사업에 제안서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여전히 경쟁이 치열한 분야이다. 지원자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경쟁률이 쟁쟁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회사에서 제안서를 써 본 사람이 나 말고는 없다는 점이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짧은 시간 안에 제안서를 혼자 다 쓸 수는 없다. 사장질과 영업부장 일을 겸하면서 한다는 건 더더군다나 쉽지 않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사람이 필요해졌지만, 여전히 좋은 사람을 뽑기 어려운 환경이니 아는 사람을 데려다가 가르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제안서를 계속 쓰지만 그만큼 떨어지는 일이 익숙해졌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했다.
학교가 두 번째 방향이자 그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자잘한 사업을 통해 친분이 쌓인 교수들이 우리가 가진 실력을 인정하고 과제 제안의 협력회사로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그들과 우리는 같이 제안서를 쓰게 되었고, 그러면서 제안서를 쓰는 요령에 대해 담당자의 실력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조금 더 나은 실적이 쌓이고 더불어 제안서 작성하는 요령이 늘었다.
몇 년을 그렇게 밖에서는 구르고 안에서는 실력을 쌓는 방식으로 우리의 고된 시간을 견뎌갔다.
그 사이 적자는 늘었지만, 밖에서도 점차 우리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실적이 쌓이자 우리가 한 단계 나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던 장애물이 서서히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우리는 우리의 목표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우선 B사(원청사)에서 C사(주사업계약업체)에게 우리를 공식 하청업체로 포함하여 제안서를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 즉, 컨소시엄 업체로써 자격을 부여받았다. C사는 끝까지 우리를 감추려고 했지만, B사에서는 우리가 실제로 일을 한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로 그들을 압박했다. 한마디로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이제 법대로 해라였다. 그간 우리가 차곡차곡 쌓은 실적도 우리가 그런 일을 하는데 충분히 적합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C사는 매우 못마땅해했다.
C사는 매출과 사업비 지급으로 우리의 목을 더욱 조였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사이 우리는 C사로부터 이것저것 100원어치의 일을 꾸준히 하청받고 있었는데, B사의 200원짜리 사업에 컨소시엄으로 들어가면서 거기서 우리의 매출이 40원 정도가 새로 발생하자 기존의 100원 어치의 일에서 40원어치를 덜어내 다른 업체에게 주었다. 그리고 40원은 따박따박 줄 수밖에 없게 되자(앞서 말한 것처럼 컨소시엄이기 때문에 B사에서 사업비 지급여부를 직접 확인한다), 나머지 60원의 지급은 그전보다 더 지연되었다.
더 최악인 것은, 200원짜리 일에서 자신들이 수행하기로 되어 있는 일이 100원이었다면, 그중에서 80원어치 정도의 일을 우리에게 40원도 안되게 다시 재하청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B사의 관리 밖이었기 때문에 사업비 지급의 지연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40원 어치의 일은 우리가 그들에게 받던 60원 어치의 일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100원 어치의 일을 하면서 손익 상황이나 자금 회전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 점점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회사 업력이 7~8년 차쯤 되었을 때, 나는 이제 이 늪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는 것을 확신했다.
탈출의 결심을 내리게 된 계기가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C사에 접대 골프를 치던 날이다. 욕심이 욕망을 채우다 보면 그 쾌락에 빠져 체면도 욕심의 끝도 잃어버리는가 보다. 새로운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업이 잘 되면 자기 용돈을 잘 챙겨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당신네 상어 떼들 때문에 바다가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었는데, 이젠 내 팔다리까지 내놓으란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실질적인 결정타는 그 B사의 기존 사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사업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에, B사의 일부 담당자가 C사가 우리에게 비공식적으로 재하청을 준 것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 일을 우리가 한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 아니라 그 가격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분노한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C사의 담당자가 우리에게 준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에 준 것처럼 B사에 말했다는 것을 우리도 알아버렸다. 더 웃긴 건 이제 B사도 우리도 C사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고 있는데, 정작 C사는 여전히 자신이 둘 다를 잘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업이 준비되었다.
C사는 그 사업의 수주를 위해 여전히 우리가 필요했다.
C사의 담당자는 나를 찾아왔다. 이전보다 더 안 좋은 조건(우리의 계약상 몫은 줄고 하는 일의 양은 똑같으면서 실질 계약 금액도 줄어드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 조차도 자신이 설득하고 힘을 써서 얻어낸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커다란 실수는 B사 담당자에게는 C사가 우리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이라고 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고, B사의 담당자는 내게, 정확한 수치는 말하지 않았지만, C사가 그들에게 설명한 거짓 조건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정도로 에둘러 언질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C사 담당자는 우리에게 자신의 배려에 대한 대가를 언급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싶었다.
C사 담당자는 손익계산서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쓸 줄도 읽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이대로는 오늘 죽나 내일 죽나 죽는 것은 결정된 포로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탈출 시도라도 해봐야 하는 것이 명확해졌다.
우선 C사에 컨소시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B사에게도 이 말을 전달했고, 양해하신다면 단독으로 직접 제안서를 작성해서 내보겠다고 했다.
허락을 받을 일은 아니지만, 예의 상으로라도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다 싶었다.
B사의 담당자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도와주지도 방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공정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기회이자 희망이었다.
우리는 정말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 년간 나는 사지에 들어갔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