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막 지나간 자리 같았다.
모든 것이 난장판이 된 대지 위에 아직 먹구름과 바람이 남아 천둥과 소나기를 내리지만, 이제 태풍을 이겨냈고 태양을 볼 것이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수년이 걸렸다.
마지막 결정타까지 극복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어떻게 일어서야 할지, 일어설 수는 있는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한동안은 누가 빚만 정리해 준다면 회사를 넘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다행히도 남들이 그렇게까지 깊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남은 선택지는 "극복"외에는 없었다. 여전히 손익계산서를 모르는 이들에게서 여러 잔소리를 들었지만, 내 주변에 남은 이들은 상어 떼가 아니었다. 너무 지쳐서 일어서지 못하는 나를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격려하고 거들어 주었다. 회사의 상태만큼이나 나의 상태도 많이 피폐해졌었지만 천천히 회복했고 여전히 회복해가고 있다. 이제, 나의 걸어온 길을 돌아볼 용기도 생겼다. 한창 트라우마에 시달릴 때는 그 복기의 시간조차도 괴로웠다.
우리는 이제서야 남들이 창업할 때 가지고 시작하는 것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자금, 인력, 시장, 사람 등등...
그들이 가지지 않은 것 중 우리가 가진 것도 하나 있다.
이 바닥에서 한번 생존한 경험과 그에 따른 지혜.
돌이켜보면, 참 무모했었구나 싶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살아보라고 하면 그때도 그 상황에서 창업을 할까?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지만, 내가 창업을 결심했을 때 내게 조언해 주신 분의 격려 말씀이 있다.
"모든 걸 다 재고 창업할 수는 없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것은 현 직장에서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는 것이다. 모든 준비를 다 하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모했기 때문에 창업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흙수저로 창업을 했었고 운이 좋았으며, 너무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스스로 프리드리히 2세(혹은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한다)와 나를 투영하곤 한다. 그의 업적을 나와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의 굴곡이 나의 지금까지의 궤적과 크기만 다를 뿐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절체절명의 순간에 뜻밖의 기회가 주어진 것도 비슷하다. 물론 프리드리히 2세가 들으면 콧방귀도 안뀌고 무시하겠지만 말이다.
앞서 나는, 창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현실을 깨닫고 우리의 목표를 용역 사업의 주계약업체가 되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언급했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그 중간 목표를 이루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입었던 여러 타격들을 회복해 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를 새롭게 또는 되새겨 보아야 한다. 위험은 여전히 똑같이(어쩌면 더 큰) 도사리고 있지만, 처음 창업했을 때와는 달라진 것들이 있다. 이제 질문해야 한다.
어떤 회사가 될 것인가?
어떤 회사를 만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