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인가, 한 8월쯤이었나 보다
주거래 은행 부장이 전화를 했다.
매년 지점장님이 수박을 선물해 드리는데, 올해는 예산이 줄어서 귀사에는 선물을 못 해 드려 안타깝다는 내용이었다.
아,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 팀장이 우리 회사를 돌려깠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 해 봄쯤이었을 것이다.
그 부장이 지점장을 대동하고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우리는 서서히 주거래 은행을 바꾸고 있었다.
서로 웃으면서 우리 은행과의 거래 잘 부탁드린다는 뻔한 이야기와 네 저희가 늘 신세지고 있습니다라는 뻔한 대답이 오고 갔다. 우리는 서서히 그리고 확고하게 그 은행과의 모든 거래를 새로운 주 거래은행으로 바꾸었다.
난 이해할 수 있다.
말로만 듣던 은행의 속성을 그때 속속들이 보았기 때문에 값싼 수업료를 내고 아주 뼈저리게 느꼈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양새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위 은행 대출의 딜레마 때문인데, 돈이 필요한 고객은 신용이 낮을 수 밖에 없고, 신용이 높은 고객은 돈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용이 높은 고객이 돈을 빌려가는 순간 그 고객의 신용은 떨어진다. 우리 회사는 당시 무척이나 어려운 변곡점을 넘어가고 있었다. 봄에 수주한 규모가 큰 계약이 연기되고 연기되어 크리스마스가 지나고서야 체결되었으니 돈만 마른 게 아니라 피가 마르고 정신이 바짝 말랐다. 나는 아직도 그 당시의 공포에 대한 트라우마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국가를 대상으로 한 사업이기 때문에 계약이 안될 이유는 없었다. 계약 규모도 그때까지 우리 회사가 했던 단일 계약 중에서 가장 큰 계약이었다. 누차 설명을 했지만, 은행에서는 그것을 이유로 대출을 늘려주지 않았다. 은행 시스템에서는 그런 것을 이해해 줄 방법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든 그 고비를 넘기려고 추가 대출을 받기 위해 적어낸 수많은 서류들 중에서 그런 항목을 기재하는 란은 어디에도 없었다. (금융자본시장에 대한 소회는 언제고 추가로 한 두 번 정리할 것이다. 우선 다음의 링크를 참고하시라. )
여기서 잠깐.
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는지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솔직히 나는 그 사업을 수주했을 때, 연말에 가서야 계약이 체결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다(지금도 그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다). 국가를 대상으로 한 사업의 계약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자원을 다른 곳에 투입할 수도 없었다. 반년 넘는 시간을 수입없이 보낸 것이다. 차라리 연말에 계약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직원들과 품팔이라도 해서 비용손실을 줄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곧 체결될 꺼야라는 실무 부서의 말만 듣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연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자.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면...
한 회사의 일반적인 영업이익률은 평균 5% 내외이다. 많이 쳐줘도 총매출의 10% 내외이다. 그 말을 바꿔서 설명하면, 한 달의 총매출은 그 회사의 1~2년 치 영업이익에 해당한다. 특히 인건비가 대부분의 비용을 차지하는 지식산업 분야에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매달 들어가는 비용에 큰 변화가 없다. 만일 어떤 회사가 직원을 유지한 채 1년을 고스란히 일없이 놀았다면, 10~25년 치 이익을 고스란히 날렸다는 뜻이 된다. 20년 열심히 벌어서 반년만에 말아먹는 꼴이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그 부장이 나중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전 솔직히 사장님 회사가 망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맞다. 당연히 이해하지. 그래서 나도 주거래 은행을 바꾸는 것을 당신도 이미 이해할 거야.
물론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 부장은 내가 굳이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을 것이다.
그 부장은 사실 얼빵하게 한방 맞은 게다.
그 전임 부장이 여우였고, 이 신임 부장은 곰이었다.
사실 우리가 막 어려운 시기를 넘어갈 때 담당 부장이 바뀌었는데, 전임 부장이 사실 더 얄미웠다. 추가 대출을 부탁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사람의 샘법도 기억난다. 그리고 대출은 안 해주면서 우리 스스로 지쳐 떨어지게 하는 점잖은 방법도 기억난다. 그리고 인수인계하면서 내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했던 말들도 기억난다(그는 우리가 제법 건실하게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했었다). 나는 그 여우에게서 은행의 속성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신임 부장은 자기가 직전에 근무했던 지점이 얼마나 많은 대기업/중견기업과 거래했는지, 그 기업의 자금 담당자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접대를 잘했는지, 그래서 자기가 여기 이런 한직의 자리에서 중소기업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소소한 일인지 알려주었다. 참 존경해야 할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다만 그게 내가 아니었을 뿐이다.
이미 선배나 책으로부터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다.
"은행은 너무 멀리 해도, 너무 가까이 해도 안된다."
안다.
그 전에는 머리로 알았다면, 지금은 뼈저리게 온몸으로 안다.
그래서 은행을 협력자로 활용하는 것을 예전보다 좀 더 현실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먹지 못했던 수박이 매년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내게 은행의 속성을 깨닫게 해 준 그 여우와 곰 덕분일 것이다.
오늘 주거래 은행을 다녀다 오면서 수박을 보고 생각이 나서 몇 자 끄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