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중앙일보 2011년 01월 11일 ("역사 외우기만 하다 질려 … 한국선 고교 가면 ‘국포자’ 양산" 중)
난 암기가 아주 쥐약이다.
고교 시절 국영수 물리는 올 100점 받을 자신이 있어도,
암기과목은 차라리 죽음에 가까왔다.
요즘과는 선택과목이 다르지만, 당시 과학과목 중 화학/물리 중 적어도 1과목을 필수로 선택해야 했는데, 난 화학/물리를 모두 선택했다. 생물과 지구과학은 아무리 공부해도 화학/물리보다 점수가 안 나왔다. 특정 몇몇 학교를 제외하고는 제2외국어와 공업(또는 상업) 중 택1일었을 때 나는 제2외국어를 선택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우연히 친구들과 선택과목 이야기를 했을 때 "너, 서울대 시험치렀냐?"고 했을 정도다.
난 암기 과목을 증오했다.
내가 국사 시험을 치러서 100점을 받은 적은 중학교 시절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춘기 시절 짝사랑하던 여선생님이 국사 선생님이셔서 잘 보이려고 밤낮으로 암기해보았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국사 혹은 역사를 배우고 시험을 치르는 목적은 암기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인가?
내가 기억하는 국사는 암기력 테스트였다.
시험 문제의 대부분은 어떤 일이 언제 일어났는가, 혹은 누가 어떤 이름의 제도를 만들었는가였다.
왜? 이런 질문은 없었다.
어떤 사건의 원인과 그 영향을 묻는 질문? 없었다.
정규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와서 역사가 정말 재미있는 학문이란 것을 알았다.
그야 말로 왜?라는 끊임없는 질문과 평가를 통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한편의 무협지 같은 혹은 추리소설 같은 재미난 학문이었다.
그러다가 병역특례 관련으로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을 보게 되었다.
국사가 그 중 한 과목이었다.
시험 문제는 역시나 나의 암기력의 한계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위의 그림은 중앙일보에 났던 기사의 사진이다.
그 기사의 첫머리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국 고교생들에게 국사 수업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대표적인 암기과목”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고교만 가면 ‘국포자(국사 포기자)’가 된다고 했다. 강의식·암기식 수업이 학생을 질리게 만든다. 초·중학교까지는 역사논술 교실에도 다니고 한국사 만화전집을 읽으며 역사를 즐겼던 학생들이 고교에 가면 무너진다."
요즘 국사를 다시 필수과목으로 변경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선택과목이 되었는지도 몰랐지만). 좋다. 올바른 일이다. 자신의 근본을 모르고서야 어찌 세상을 값지게 살아가겠는가? 더우기 역사를 이해하고 온고지신하게 한다는 것 좋다.
하지만, 암기력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평가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사를 가르치겠다면,
차라리 파이를 몇자리까지 정확하게 암기하는지를 필수과목으로 선정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면서 효과적일 것이다.
요즘 EBS의 "정의"라는 강의가 유행이다. 어제 EBS에서 몰아방송을 해준 덕에 재미나게 보았다.
하버드의 철학강의라고 어렵던가?
어느 철학자가 어느 학파이고 무슨 말을 했고 그런 걸 강의하던가?
그 강의의 내용은 왜?라는 논리를 다루지 암기를 다루지 않는다.
누구 말만 따라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지 따위는 인터넷에서 5초만에 알아낼 수 있다.
그거 몰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도 없다.
하지만, 왜 우리가 외침을 받았는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어디에 나온 답이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다.
몇년도에 무엇을 하였는지 묻는 역사는 전공자들에게나 평가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