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에 직원과 면담을 하면서
나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기회가 있었다.
대기업 임원의 아들이었던 나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인생에 대한 복잡한 고민들을 부친과 함께 토론할 수 있었고,
돈이 넘쳐서 주체 못할 지경은 아니었지만, 가난함에 대한 설움은 없었다.
인생에 대한 모델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둘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받은 환경이었지 않는가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그로 인해 꼭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처럼,
차라리 좀 부족하신 부모였다면 나의 청춘은 힘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소년을 벗어나 청년이 되면서부터
나는 나의 삶의 소유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부모님은 나를 당신들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길로 이끌어주시고 싶어했다.
나는 청년이었지만, 당신께는 내가 소년이었던 셈이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있겠지만,
나의 대학과 전공 선택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다.
나는 유전공학을 무척이나 하고 싶어했다.
당시 몇몇 대학만 가능한 전공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지만, 재수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산, 요즘말로 IT분야에서 꽤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계시던 당신께서는
전산과 진학을 기대하셨다. 당신이 갖고 계신 경력이나 인맥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무척이나 티격태격한 끝에 전산과에 진학했다.
물론 난 재수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재수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그 학교에 계셨던, 지금은 은사님이신 교수님께서 합격 발표 전날 연락을 주셨는데,
합격했다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점수를 대폭 낮춰 지원했으니까.
그런데 다음 말씀이, 어지간히 공부 안했나 보네. 꼴지에서 두번째로 겨우 붙었다.였다.
어린 마음에 엄청난 좌절감이었다. 2년여 가까이 방황을 했고 대학 4학년이 되서야 겨우 마음을 잡고 공부해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은사님께서 술한잔하시고 하신 말씀이
너를 재수 안시키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냥 웃었다.
그리고 두번 다시 내 인생을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으리라 단단히 결심했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할 당시, 97년말 IMF가 터졌다.
직장을 구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냥 구해도 어려울 때에 나는 병역특례 자리를 구해야 하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느날 나의 부친은 내게 조용히 갈 곳이 있으니 석사 논문을 들고 오라 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간 그 자리는 일종의 취업 청탁 자리였다.
매우 시건방진 자세로 불성실하게 자리에 임했다.
그날 대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신께 드린 나의 마지막 말이 "감사하지만 필요없습니다" 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전공과는 많이 다른 곳에 내가 알아서 취직했다.
"제발 제 인생에서 이제 그만 비켜주세요"
그것이 내가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이었다.
소위 인생에서 성공하신 부모를 둔 자식은 배고픔은 없지만, 인생은 고달프다.
안 그런 사람 못봤다. 그런 걸 보면 잘난 부모 둔 친구 부러워할 것 못된다.
세상은 공평한 법이다.
자식은 심리적인 본능상 부모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런데 그런 부모가 저 높은 곳에 있고, 나를 지배하려 하면
대게 셋 중 하나가 된다.
추락하거나 도망가거나 극복하거나.
은사님의 말씀처럼 아내의 말처럼
자식이 대기업에 취직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모를 둔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난 추락하거나 도망가진 않았다. 극복했다 정도는 되겠지.
자식 잘되라는 부모의 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나의 삶도 고단했다.
그 면담한 친구.
한참을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더니 자기 속 이야기를 했다.
나와 비슷한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바램도
"이젠 제발 내 삶에서 비켜주세요"였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해준 충고는
"자립은 능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니 부채나 잘 갚아라. 그리고 직장 생활 열심히 해라"였다.
참고로, 그 친구 부채를 갚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 두고 프리로 뛰고 싶다는 고민을 들어주던 참이었다.
나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기회가 있었다.
대기업 임원의 아들이었던 나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인생에 대한 복잡한 고민들을 부친과 함께 토론할 수 있었고,
돈이 넘쳐서 주체 못할 지경은 아니었지만, 가난함에 대한 설움은 없었다.
인생에 대한 모델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둘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받은 환경이었지 않는가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그로 인해 꼭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처럼,
차라리 좀 부족하신 부모였다면 나의 청춘은 힘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소년을 벗어나 청년이 되면서부터
나는 나의 삶의 소유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부모님은 나를 당신들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길로 이끌어주시고 싶어했다.
나는 청년이었지만, 당신께는 내가 소년이었던 셈이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있겠지만,
나의 대학과 전공 선택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다.
나는 유전공학을 무척이나 하고 싶어했다.
당시 몇몇 대학만 가능한 전공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지만, 재수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산, 요즘말로 IT분야에서 꽤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계시던 당신께서는
전산과 진학을 기대하셨다. 당신이 갖고 계신 경력이나 인맥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무척이나 티격태격한 끝에 전산과에 진학했다.
물론 난 재수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재수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그 학교에 계셨던, 지금은 은사님이신 교수님께서 합격 발표 전날 연락을 주셨는데,
합격했다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점수를 대폭 낮춰 지원했으니까.
그런데 다음 말씀이, 어지간히 공부 안했나 보네. 꼴지에서 두번째로 겨우 붙었다.였다.
어린 마음에 엄청난 좌절감이었다. 2년여 가까이 방황을 했고 대학 4학년이 되서야 겨우 마음을 잡고 공부해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은사님께서 술한잔하시고 하신 말씀이
너를 재수 안시키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냥 웃었다.
그리고 두번 다시 내 인생을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으리라 단단히 결심했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할 당시, 97년말 IMF가 터졌다.
직장을 구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냥 구해도 어려울 때에 나는 병역특례 자리를 구해야 하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느날 나의 부친은 내게 조용히 갈 곳이 있으니 석사 논문을 들고 오라 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간 그 자리는 일종의 취업 청탁 자리였다.
매우 시건방진 자세로 불성실하게 자리에 임했다.
그날 대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신께 드린 나의 마지막 말이 "감사하지만 필요없습니다" 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전공과는 많이 다른 곳에 내가 알아서 취직했다.
"제발 제 인생에서 이제 그만 비켜주세요"
그것이 내가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이었다.
소위 인생에서 성공하신 부모를 둔 자식은 배고픔은 없지만, 인생은 고달프다.
안 그런 사람 못봤다. 그런 걸 보면 잘난 부모 둔 친구 부러워할 것 못된다.
세상은 공평한 법이다.
자식은 심리적인 본능상 부모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런데 그런 부모가 저 높은 곳에 있고, 나를 지배하려 하면
대게 셋 중 하나가 된다.
추락하거나 도망가거나 극복하거나.
은사님의 말씀처럼 아내의 말처럼
자식이 대기업에 취직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모를 둔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난 추락하거나 도망가진 않았다. 극복했다 정도는 되겠지.
자식 잘되라는 부모의 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나의 삶도 고단했다.
그 면담한 친구.
한참을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더니 자기 속 이야기를 했다.
나와 비슷한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바램도
"이젠 제발 내 삶에서 비켜주세요"였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해준 충고는
"자립은 능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니 부채나 잘 갚아라. 그리고 직장 생활 열심히 해라"였다.
참고로, 그 친구 부채를 갚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 두고 프리로 뛰고 싶다는 고민을 들어주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