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를 애인 얼굴 보듯 하는 상사를 만나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다.
내가 만난 최악의 "회의러"는 하다 하다 다음 회의에 무슨 회의를 할지 회의하자고 회의 소집을 했다.
당최 일할 시간도 주지 않고 회의만 하는 것도 징글맞고, 아무런 생산성 없는 회의를 하루에도 몇 번씩 연일 반복하다 보면 저게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나는 그런 "회의러"를 반면교사로 삼은 덕에 그래도 회의를 좀 적당히 하는 꼰대로 평가받고 있다.
악성 "회의러"가 아니라 좋은 꼰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회의의 성격을 정의하고 회의를 소집하라.
이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내용인데, 이 회의가 보고회인지, 토론회인지, 업무 미팅인지, 잡담인지, 브레인스토밍인지 회의의 목적과 성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회의의 성격에 따라서, 회의의 시간과 형식, 참석자가 달라진다.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그 회의의 목적과 성격을 정의하라.
둘째, 회의 주최자로서의 성격을 정의하고 회의를 주관하라.
특히, 내가 보스로서 회의를 주최해야 하는가, 서번트 리더로서 회의를 주최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라.
앞서 말한 회의의 성격을 정의하면 대체로 자신의 역할을 정의할 수 있다.
업무를 지시하고, 동료들을 다그쳐서, 마치 고지를 점령하듯 밀어붙여야 한다면 당신은 보스로서 회의를 주관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모으고 동료를 격려하고 구성원 또는 부서간 협력을 끌어내야 한다면 당신은 서번트 리더로서 회의를 주관할 것이다. 어떤 주최자로써 주관하는가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어떤 모자를 쓰고 회의주최자가 될 것인가는 판단하고 시작해야 한다
셋째, 회의에서 얻고자 하는 결과물에 집중하라.
회의가 어떤 목적으로 소집되는지 정리되면 얻고자 하는 것도 쉽게 정의된다.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야기가 엉뚱하게 흐르거나, 토론을 하다 말고 책망을 하거나, 회의가 회의를 낳거나(꼭 필요한 회의는 분기할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 회의를 위한 회의는 삼가야 한다), 갈 곳 잃은 가출소년처럼 지향점 없이 지루한 회의만 하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넷째,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예상 종료시간을 설정하고 공지하라.
보고회를 제외한 회의는 대체로 주최자가 끝내고 싶을 때 회의가 끝나기 마련이다. 즉, 늘어지고 늘어지고 늘어지는 회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회의가 끝날 시간을 미리 정하라. 그리고 엄수하기 위해 노력하라.
그러면, 희한하게도 쓸데없는 소리를 서로 자제하게 된다. 말이 길어지는 것을 커트할 명분도 생긴다.
나는 대체로 이렇게 공지한다.
우선, 참석자들에게 양해가 되는 시간을 물어본다.
그리고 "희망컨데는 00:00에 끝내는 걸로, 최대 00:00을 넘기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회의를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결과가 정의되는 공식회의에서는 회의록을 꼭 남기고, 다른 건 몰라도 Action Item은 꼭 정의하고 관리하라.
회의록!! 절대 복잡하고 격식 차려서 어렵게 쓰지마라. 양식에 다 맞춰 쓰려고도 하지 말고, 논리 정연하게 쓰려고도 하지 마라.
꼭 필요한 것만 그것도 간단한 양식으로 쓰면 된다.
꼭 필요한 거란 게 뭐겠는가?
회의 제목, 회의 날짜, 회의 장소, 회의 참석자. 이건 그냥 툭툭 쓰면 된다.
그리고, 회의에 사용한 문서, Action Item review 및 신규 AI 정의, 회의내용.
회의 내용은 그냥 그날 회의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할 수 있게 날림 메모로 적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당신이 만약 회의적인 "회의러"를 상사로 두었다면, 아마 회의실이 곧 지옥일 것이다.
회의러가 드러운 이유는 회의러가 싸질러 놓은 구린 똥을 치우기 위해(결론이나 방법은 없고 지시만 있는 회의) 어쩔 수 없이 나도 회의를 주최해야(똥을 싸야) 한다는 것이다.
인내하라.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동료들에게 회의의 모범을 보여라.
언젠가 그것이 빛을 줄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회의록에 대한 몇 가지 사족을 달까 한다.
회의러.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회의록도 못쓰게 한다(허긴 회의록을 쓰자고 하면 쓸 것도 없을 것이고 어떻게든 써놓고 보면 본인도 참 민망할 거다). 나도 그런 상사가 있었다.
그럴 땐 당신의 다이어리에 꼭 메모를 남겨라. 마치 회의록처럼...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 들이랑 무슨 회의를 했고 어떤 지시사항이 있었는지 나는 어떤 의견을 냈는지 낙서형식으로라도 메모하라.(알아볼 수 있게만이라도 써 놓아라. 물론 다이어리의 많은 부분이 동심원들과 욕으로 채워져 있을 테지만, 그닥 상관없다.)
그 상사가 엉뚱한 소리를 하다 못해 내게 본인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 씌울 때, 나는 그 다이어리를 보여주었다.
그날의 회의뿐 아니라 그 이전, 이후의 회의 내용도 모두 기록되어 있었고 그날들의 메모 내용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날 회의에 대한 메모 내용도 인정받았고, 그 낙서 같은 메모에는 이 잘못은 그 사람이 지시한 대로 실행한 결과이고, 심지어 나는 반대했었다는 것도 남아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일 년간 나를 갈구었지만, 나는 여전히 묵묵하게 일했고(메모하는 것도 시비를 걸었다) 결국 그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또 다른 사족. 팁 두 개.
첫째, 회의록은 쓰는 사람이 유리하다.
회의록을 직접 써보면 안다, 작성자의 의도가 향기로 배게 된다는 것을...
심지어는 내게 별로 불필요한 것은 기록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런데 고맙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록을 쓰는 것을 귀찮아하기 때문에 작성하길 꺼려한다.
고객과 회의를 한다면, 그리고 그 고객이 "회의러"이거나 말 바꾸기 선수라면, 회의록은 꼭 당신이 써라.
두 번째, 회의록에 서명을 받는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된다. 사실 필수요소이다.
서명해 주는 사람도 싫어하고 그걸 일일이 받으러 다니는 당신도 귀찮다.
하지만 서명을 받은 것과 아닌 것은 목숨의 붙는가 떨어지는가의 차이와도 같다.
심지어 그것이 나뿐 아니라 고객도 살릴 수 있다.
그 당시 핀잔을 들어가면서 회의록을 쓰고 꼬박꼬박 사인을 받아두었다.
원래는 하도 고객의 말이 바뀌길래 그렇게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사인하기를 꺼려했고, 심지어 같은 회사 사람들도 빨리 집에 가자고 대충하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참석자들이 싸인하기 전에 회의록을 꼼꼼히 보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선을 그어 수정하고 싸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고객의 요구도 명확해지고, 고객의 말바꿈도 매우 신중해졌다. 나중에는 고객이 먼저 그때 무슨 말 했었는지 회의록을 뒤져보기까지 했다.
점차 회의록 작성이 자리를 잡자 서로 일이 편해졌다. 그 이후로 정말 너무 바빠서 회의록 쓰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객이 나를 붙잡아 놓고 회의록 쓰고 싸인 받고 가라고 할 정도로 바뀌었다.
요즘은 사인을 받지 않고 비슷한 효과를 내는 방법이 있긴 하다. 예를 들면, 회의 중에 회의메모를 작성하고, 이를 회의 종료 직후 같이 살펴본 다음 동의를 구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참석자들에게 메일로 쏜다. 법적 효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회의록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례는 고객이 자체 감사를 받을 때였다. 생각해 보니 참 오래전 이야기이다.
그 시절 감사는 그야말로 누구 하나 검찰에 고발되어야 끝나는 표적감사였는데, 그런 경우, 대부분 누군가의 편의를 봐주고 대가를 받는 것이 주요 사유로 고발한다. 감사를 내려온 사람들은 개발 내용이 애초 계약과 다르게 변경되었다며, 그건 편의를 봐준 거라는 트집을 잡았다. 처음에는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대응을 하다가 어느 순간, 근거가 있는 사유로 인해 그리고 규정된 절차에 의해 변경한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고객은 내게 전화를 걸어 그간의 회의록 "원본"을 가져다 달라는 요청을 했다. 우리는 얼른 복사본을 만들어 별도 보관하고 원본을 전달했고, 그 원본 회의록을 근거로(고객도 동일한 사본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원본이 필요했을 뿐이다) 규정된 절차에 따라 합리적인 사유로 변경이 일어났음을 증명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고객은 회의록 원본을, 우리는 복사본을 갖게 되었다.